아이작 뉴턴 (Sir Isaac Newton: 1642∼1727)

    국적 : 영국

    업적 : 중력 발견

영국 물리학자·수학자·천문학자. 자연철학자로서, 막대한 신학·연금술의 논고·유고도 있기 때문에 신학자 또는 최후의 연금술사로 불리기도 한다.

과학상의 업적은 3개의 대발견이라 불리는 빛의 스펙트럼, 만유인력의 법칙, 미적분법과 3가지의 새로운 운동법칙을 발견하였고, 그랜섬시대부터 화학과 연금술에 흥미를 가져 여러 합금을 만들었으며, 열의 냉각법칙(1701) 등 광범위한 분야를 연구했다.

매뉴팩처의 전 시대를 통해 기술상의 주요 과제는 기계적인 문제였다. 예를 들어 수상수송의 영역에서 선박의 적재량·속도·안정항행·조타성능·운하망·수문정비 등의 과제는 부력을 비롯하여 저항매질 중에서의 물체의 운동 법칙과 조석현상의 해명을 필요로 하여, 유체의 유출, 물의 압력, 유출속도와의 관계등 유체정역학·동역학적 연구를 촉진시켰다. 수차나 풍차 등 자연력의 이용은 역학적 현상을 대상화하여 인간의 근육력과 등가의 관계를, 즉 인간노동을 작업량으로 정량하여, 자연의 모든 힘을 비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군사적 영역에서 포탄과 화기는 물체의 자유낙하, 포물체운동, 작용·반작용 그리고 충돌문제를, 기계와 토목건축용 자재는 재료역학상의 문제를 제기하여 레오나르도 다 빈치 시대 이후 이러한 과제에 대한 연구성과가 축적되었다. 이들을 총집한 것으로서 천체와 지상 역학의 통일적 체계화가 가능하게 되었던 시대, 이것이 뉴턴역학의 출현을 준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뉴턴은 신에 순종하여 교회와 타협하려 함으로써, 그가 입각해 있는 사회를 옹호하는 입장이 선명해졌고, 그 시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데모크리토스 (Demokritos: BC 460∼BC 370)

    국적 : 그리스

    업적 : 원자론 철학의 완성

고대 그리스 철학자. 원자론 철학의 완성자. 트라키아지방의 압데라 출생. L.디오게네스가 기록한 저작 목록에 의하면, 그의 저작은 원자론의 기본이론·우주론·천문학·지리학·생리학·의학·감각론(感覺論)·지식론·수학·자기학(磁氣學)·식물학·음악이론·언어학·윤리학·농업·회화(繪畵) 등에 관한 많은 저작을 했다고 하지만, 남아 있는 것은 몇몇 단편(斷片)들 뿐이다. 만물의 근본이 되는 것(아르케)은 불생(不生)·불멸(不滅)·불변(不變)하는 원자(atom;분할되지 않는 것)인데, 이것은 수적으로 무한하지만 형태와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르며 공허(空虛;공간) 속에서 운동하며 그것의 이합집산으로 만물이 생성하거나 소멸한다. 따라서 <습관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색깔·달콤한 것·쓴 것 등이 있지만 실제로는 원자와 공허만이 존재한다>라고 말하였다. 또 오성의 활동은 불과 같은 성질을 갖는 영혼의 원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러한 원자들은 육체의 원자들과 서로 층을 교환하면서 인간을 구성한다고 하였다. 향락에 있어서의 절도와 생활의 균형으로 얻어지는 <쾌활>을 윤리적 이상으로 삼아 <웃는 철학자(Gelasinos)>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원자의 존재를 주장하고 나서자, 그를 비웃었다. 그가 주장한 원자설은 다음과 같다. "치즈를 둘로 자른 다음, 그 한조각을 다시 둘로 자른다. 이런 식으로 치즈를 계속 둘로 잘라 나간다면, 결국에는 더 이상 둘로 나눌 수 없는 작은 알갱이가 나올 것이다. 그것이 바로 원자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원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며, 데모크리토스의 생각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약 2000년이 지난 후, 데모크리토스의 생각은 옳은 것으로 밝혀졌고, 그는 최후에 웃는 사람이 되었다. 여러 방면에 박식해 <지혜(Sophia)>라고도 불리었다. 서양철학사에서 후대에 미친 그의 영향은 매우 크다.

 

존 돌턴 (John Dalton: 1766~1844)

    국적 : 영국

    업적 : 원자론의 기초 확립

과학에 관한 그의 최대 업적은 원자론이지만, 그 착상의 기원은 초기의 기상학 연구에 있다. 1787년부터 시작한 기상관측은 죽기 전날까지 57년 동안 20만 회 이상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93년에 기상관측의 기록과 무역풍·오로라·기상변동·증발 등에 관한 고찰을 정리하여 최초의 저서 《기상학적 관측과 논문집》을 출판하였다. 돌턴은 대기 중의 수증기나 대기의 구성 문제를 계속 연구하여 1801년, 같은 종류의 기체입자 사이에는 반발력이 작용하지만 다른 종류의 기체입자 사이에는 반발력이 작용하지 않는다고 하는 가설에 기초를 두고 혼합기체의 부분압력의 법칙(돌턴의 법칙)을 제창, 대기가 기계적 혼합물인 것을 증명하였다. 또 기체의 열팽창이 종류에 관계없이 일정하다는 것(샤를의 법칙)도 발견하였다. 1802년 친구인 W. 헨리와의 공동연구로 물에 대한기체의 용해도가 그 압력에 비례함(헨리의 법칙)을 밝혀내었고, 다음해에 기체의 종류에 따라 용해도가 다른 이치를 기체의<구극(究極) 입자의 무게와수>의 차이로 구하였다. 이렇게해서 최초의 원자량표와 원형의 원자기호가1803년 9월 6일의 실험노트에 기록되었다. 다음해 메탄 CH運과 에텐 C芸H運의 분석으로부터 배수비례의 법칙을 발견하는 등, 돌턴은 화학에서의 원자론의 중요성을 점차 깊게 인식, 그 자세한 내용을 《화학의 신체계(1808)》에 기록 해놓고 있다. 근대화학의 기초이론은 고대 그리스 이후의 철학적 원자론과 A.L.라부아지에에 의해 확립된 근대적 원소개념을 결합하여 원자량이라고 하는 규정성을 부여함에 따라 이루어졌다. 돌턴의 원자론은 J.톰슨의 지지로 널리 알려졌지만, 데이비나 월라스턴과 같은 유력한 화학자들 중에는 원자론이 사변적인 생각이라는 반대론도 있었다. 또 돌턴의 원자량결정법은 원자의 결합양식에 대하여 최단순성의 원리라고 하는 가정(예를 들어 물의 분자식은 ⊙○ 즉 HO라고 한다) 위에 세워져 있으므로, 그대로는 J.L.게이―뤼삭의 <기체반응의 법칙>이나 <아보가드로의 가설>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돌턴 자신은 이들 법칙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의 연구나 J.J.베르셀리우스의 정확한 원자량 측정 등으로 원자론은 더욱더 풍부한 내용을 얻어, 화학에서는 빠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또 돌턴은 자신이 색맹이라는 것을 안 후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연구했기 때문에 색맹을 daltonism이라고 한다.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Dmitrii Ivanovich Mendeleev: 1834∼1907)

    국적 : 러시아

    업적 : 주기율 발견

주기율을 발견한 러시아 화학자. 서(西)시베리아 토볼스크 출생. 1855년 페테르스부르크의 중앙교육대학을 졸업했다. 59년부터 2년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대학에 유학하여 64년 전임강사, 65년 공업화학담당교수가 되었다. 초기의 연구는, 결정동형(結晶同形)·비(比)부피·모세관현상·표면장력과 기체의 절대끓음온도(임계점), 알코올수용액의 밀도 등 물리화학 방면으로 치우쳤다. 그것은 홑원소물질이나 화합물에 있어서 객관적으로 측정가능한 여러 성질과 그 조성과의 관련을 추구한 것으로, 뒤의 주기율 발견으로 이어진다. 유학중이던 60년에는 원자량·분자량 개념의 혼란을 해결하기 위하여 카를스루에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화학자국제회의에 참석하였다. 귀국 후 얼마 뒤 저술한 《유기화학(1861)》에는 새로운 원자량체계를 채용하였다. 올바른 원자량개념은 주기율 발견의 불가결한 전제였다. 67년 멘델레예프는 페테르스부르크대학 일반화학교수가 되었으며, 그 강의를 위한 교과서로서 주요 저서인 《화학의 원리(1868∼71)》의 집필을 시작하였다. 여기서 당시 알려져 있던 63종의 원소를 어떤 순서로 해설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고찰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69년 3월에 비로소 주기율을 발견하였다. 즉 그는 원자가를 비롯, 화학적 성질이 유사한 원소그룹 상호의 원자량을 비교함으로써, <원자량의 크기에 따라 배열된 원소는 그 성질이 주기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에는 이미 알려진 원소 모두가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발견되지 않은 원소를 위한 빈 자리가 설정되어 있었고, 또한 베릴륨 등 몇 개의 원소는 바른 원자량으로 고쳐져 올바른 위치에 배치되었다. 그는 주기율의 옳음을 확신하고, 70년 3종의 미발견원소의 성질을 상세히 예언했는데, 차례차례 발견된 갈륨(1875)·스칸듐(1879)·게르마늄(1886)의 3원소의 성질은 그의 예언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독일의 J.L.마이어도 멘델레예프와 같은 해에 거의 같은 법칙을 발견했으나, 미발견원소의 예언에는 이르지 못했다. 멘델레예프는 약 3년간 주기율 연구에 몰두한 뒤, 다시 기체와 용액의 연구를 하였다. 그는 과학적 연구 외에도 러시아의 산업발전을 위한 수많은 기술학적 연구와 저작을 하였다. 90년 대학을 사임하고, 93년 도량형국장관으로서 일생을 보냈다. 

리비히 (Justus von Liebig: 1803∼1873)

    국적 : 독일

    업적 : 이성질현상의 발견

독일 화학자. 다름슈타트 출생. 아버지가 약과 염료를 제조·판매하여 어려서부터 화학실험에 친숙했다.1820년 본대학에 입학, W.G.가스트너에게 배우고, 에를랑겐대학으로 옮겨 22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해에 파리로 유학하여 J.L.게이뤼삭의 실험실에서 본격적으로 정량적 실험화학을 배웠고, 24년에는 기슨대학 조교수로 취임, 다음해 교수가 되고 52년 뮌헨대학 교수가 되었다. 리비히는 200편 이상의 화학연구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① 유기화합물 분석법의 개량 및 여러 화합물의 실험식 결정 ② 기(基)의 이론에 대한 실험을 통한 증명 ③ 여러 새로운 화합물 발견(클로로포름·클로랄·알데히드 등) ④ 산의 수소설 ⑤ 농업 및 동식물의 생리화학적 연구 등으로 분류된다. 또, 파리 유학시절에 풀민산염의 구조를 결정하였다. 이것은 F.뵐러가 발표한 시안산염의 조성과 동일해서 논쟁이 벌어졌으나,1826년 이 두 물질이 동일 조성의 이종화합물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이성질현상의 발견). 31년에는 이전보다 빠르고 정확한 새로운 유기화합물 정량분석법을 발표하였다. 리비히칼리구, 리비히냉각기 등은 지금도 유명하다. 뵐러와 공동연구하여 32년 벤조일기를 발견하고, 같은해 알코올과 에테르가 에틸기의 화합물임을 증명하여, 유기화합물의 구조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요산을 연구한 이후로 생리화학 분야에 정진하였다. 또 37년에 고편도(苦扁桃)의 성분 아미그달린이 고편도 속의 <효모같은 물질> 에멀션에 의해 가수분해되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효모는 미생물이 아니며, 발효는 분해상태에 있는 물질의 진동이 당(糖)에 전달되어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 때문에 57년에 발효는 미생물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한 L.파스퇴르와 격심한 논쟁을 벌였다. 그는 《농업과 생리학에 응용되는 유기화학(1840)》에서 <식물의 영양은 토양 속의 부식질(humus;동식물의 부패물)이 아니라도 무기물이면 가능하고, 탄소분을 공기 속의 이산화탄소에서, 수소분을 물에서, 질소분을 공기 속의 암모니아(뒤에 정정함)에서, 회분을 흙에서 얻으므로 수확만을 목표로 하는 약탈농업이 되면 회분을 흙에 공급해야 함>을 서술하여, 사상 최초로 칼륨과 인산염의 인공비료를 만들었다. 42년 《동물화학》을 출판하여, 동물의 영양에는 탄수화물·지방·단백질이 필요한데 탄수화물과 지방은 체내에서 에너지원으로 되고, 단백질은 신체 구성요소로 된다고 하였다. 또, 연구교류를 목적으로 논문지 《화학·약학연보》를 창간하였는데, 이 잡지는 《Liebigs Annalen der Chemie》로 개제되어 계속 발간되고 있다.

 

앙투안 라부아지에 (Antoine-Laurent Lavoisier: 1743~1794)

    국적 : 프랑스

    업적 : 광수에 염이 소량 포함되 있는 것 발견, 물 속의 수소와 산소가 들어있는 것, 공기중에 포함된 기체 발견 등

프랑스 화학자. 파리 출생. 고등법원 검사의 아들로 태어나 마자랭콜레주에서 공부한 뒤 파리대학법학부에서 1764년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자연과학 지식을 얻는 데 열중하였고, 특히 지질학자 J.E. 게타르의 영향으로 광물표본을 모으기도 했다. 최초의 화학연구는 64년부터 65년까지의 석고 분석으로, 일찍이 정량적 방법이 쓰였던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67년에는 게타르와 함께 광물지질 지도 작성을 위한 여행을 하였고, 그 후에도 10년간 이 지도의 완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 여행에서 모은 음료수의 분석 결과를 발표하여 68년에 파리과학아카데미회원으로 뽑혔다. 그 해 말에 물이 흙으로 바뀔 수 있다는 설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물을 밀폐 용기내에서 101일간 계속 끓인 뒤 정확히 칭량한 결과, 생성된 하얀 침전물은 용기의 내벽이 녹아 나온 것임을 보여주어 이전의 설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하였다.

당시 화학자들의 흥미를 끈 것 가운데 연소가 있는데, 다이아몬드의 연소와 볼록렌즈를 사용한 태양광선에 의한 연소실험이 되풀이되었다. 연소의 이론으로는 G.E. 슈탈에 의한 플로지스톤설이 유명했는데, 연소란 일종의 분해현상으로 연소물질 안에 함유되어 있던 플로지스톤이 튀어나와서 열과 불꽃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속이 가열에 의해 재가 되는 하소(하燒)도 연소와 같은 현상으로 간주하였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연소 후에 남는 재는 가벼워지는데, 금속의 재는 모두 무게가 증가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 72년 인을 연소시키는 실험을 하여 무게가 증가한다는 것과 이어서 황에 대해서도 똑같은 상황임을 발견하였는데, 그때 공기가 흡수되는 사실에서 연소나 하소 때의 중량 증가의 원인은 공기흡수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74년 10월 J. 프리스틀리가 산화수은실험 및 그때 얻어진 연소를 돕는 기체(산소)에 관하여 발표했지만 그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75년 그는 산화수은을 세게 가열하여 산소를 얻는 실험을 반복함으로써 이산화탄소와의 구별을 분명히 설명하였다. 산소라는 명칭은 79년에 제창되었는데, 그 동기는 일반적으로 산소와 결합하면 산이 생성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연소 때의 무게 증가는 결합하는 산소의 양과 일치하므로 플로지스톤을 가정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플로지스톤설을 비판하였다.

82년부터 83년까지 그는 라플라스와 협력하여 열량계에 의한 실험을 하였다. 이는 라플라스의 고안에 따르는 것으로 얼음이 열에 의해 녹아서 물이 된 양을 재는 간단한 장치인데 비열, 반응열, 호흡에 의한 열 등이 측정되었다. 그는 수소도 산소와 결합하면 산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물의 생성(캐번디시가 발견)을 무시했는데, 물의 분해를 처음으로 실행한 사람은 바로 그였다. 84년에 철관을 달군 다음 그 속에 물방울을 떨어뜨려 수소를 얻었으며, 85년 물은 정확히 산소와 수소로만 구성되어 있음이 정량적으로 확인되었다. 87년 기통 드 모르보를 중심으로 라부아지에 등 반(反)플로지스톤파에 의하여 《화학명명법》이 출판되었고, 원소의 정의와 함께 수소·질소 등의 명칭이 채용되었다. 그러나 그 원소 중에는 빛이나 열소(caloric)가 함유되어 있고, 그에 따르면 산소가스는 산소원소와 열소가 결합된 것이었다. 89년에 이 새 명명법 및 새로운 기체화학에 기초하여 입문서인 《화학요론》을 집필하였는데, 질량보존의 원리가 명확히 서술되고 있다. 그는 농업에도 관심을 보여, 작물의 수확을 늘리기 위한 실험을 시작하였고, 왕립농업학회와 정부의 농업위원회에도 참가하였다. 사상적으로는 F. 케네 등의 중농주의자에 가까웠다.

프랑스혁명은 다른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정치적 참가의 터전을 제공하였다. 혁명 전인 87년에 제 3 계급 대의원으로서 활동했고, 89년에는 파리자치시의 대의원이 되었으며 91년에는 징세청부제도가 폐지되었으나, 그의 재정상의 수완이 인정되어 국고재무위원에 임명되었다. 국민의회에 의하여 도량형의 통일이 결정되자, 새로운 단위 결정을 위하여 과학아카데미 안에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는 질량의 단위를 결정하기 위하여 각 온도하에서 일정 부피의 증류수의 질량을 정밀하게 측정하였다. 그는 바쁜 공무중에도 연구를 계속했는데, 그 대상은 기체화학에서 호흡과 연소의 관계와 같은 생리학적인 것으로 옮겨갔다. 92년에 그는 과학아카데미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직책을 모두 사임했으나, 공포정치가 시작된 93년 여름에는 다른 모든 학회와 함께 과학아카데미도 폐쇄되었고, 그 해 가을에 체포되어 94년 5월 사형되었다.

알랙산데르 부틀레로프 (Aleksandr Mihailovich Butlerov: 1828∼1886)

    국적 : 러시아

    업적 : 포름알데히드를 사용, 글루코오스(포도당)를 만드는 방법 발견

러시아 화학자. 치스토폴 출생. 카잔대학에서 공부하며 처음에는 곤충학에 관심을 가졌으나 K.K.클라우스(루테늄의 발견자)와 N.N.지닌에게 화학을 배운 뒤 유기화학연구에 뜻을 두었다. 1857∼68년 카잔대학 화학교수를 거쳐 68∼85년 페테르부르크대학 화학교수를 지냈고 1874년 페테르부르크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처음에는 라디칼이론을 따랐으나, 1854년 지닌을 통해 A.로랑과 C.F.제라르의 새로운 화학이론을 알게 되었고, 57∼58년 서유럽 체재 중 A.W.H.콜베·A.케쿨레·R.W.분젠·R.A.S.E.에를렌마이어·C.A.위르츠·쿠퍼 등을 알게 되면서 최신 유기화학 이론을 익혔다. 58년 발표된 케쿨레·쿠퍼의 4가의 결합사슬 탄소원자개념을 출발점으로 자신의 요오드화메틸렌의 실험적 연구를 통해 당시로서는 알 수 없었던 물리적 수단으로 결정될 분자의 <기계적 구조>와는 구별하여, 화학적 방법에 의해 얻을 수 있는 분자구조를 반영한 <화학구조>의 개념에 도달하여 이 개념을 61년 제창했다. 화학식을 단순한 유사성이나 반응성의 표현으로 보지 않고 일정한 분자구조의 표현으로 보아 고전적 유기구조론의 출발점을 명확히 제시했다. 이 이론에 의해 이성질체의 존재를 실례로 들어 예언하였다. 예를 들면, 2개의 부탄이 성질체의 예언과 이소부탄의 합성, 삼차부틸알코올의 합성과 그 구조결정 등 화학구조론 확립에 힘썼다. 그 밖에 올레핀중합의 선구적 연구와 최초로 당모양 물질을 합성하는 등의 업적이 있으며, 실험실습에 중점을 두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심령현상을 연구하였고, 양봉업 진흥을 위해서도 활동했다.

 

베르셀리우스 (Jons Jacob Berzelius: 1779∼1848)

    국적 : 스웨덴

    업적 : 셀레늄 발견, 원자량표 발견

스웨덴 화학자. 베베르준다 출생. 1796년 웁살라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함과 동시에 화학을 독학하였다. 1802년 의학학위를 취득, 스톡홀름대학 의학부에서 무보수의 조수로 일하면서 화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1807년 스톡홀름대학의 의학·약학교수로 지내다 10년 의과대학으로 독립한 후 학장으로 근무하였다. 19세기 전반 유럽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화학자였다. 연구의 중심을 J.돌턴의 원자론에 기초를 두고 정확한 원자량을 결정하는 데로 돌려, 우수한 실험기술을 구사하며 정밀한 원자량표를 발표하였다(1814·1828년). 또 그러한 연구과정에서 세륨 Ce·셀렌 Se·탄탈 Ta를 발견하고 규소·탄탈·지르코늄 Zr를 단리하였다. H.데이비에 의한 화학결합의 전기설을 발전시켜 전기화학적 이원론(dualistic theory)을 제창함으로써, 그 후 J.B.A.뒤마에 의해 부분적으로 부정되기까지 화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또 현재의 원자기호는 그에 의해 제창된 것이며, 이성질체현상 및 촉매작용을 처음으로 인식했다. 전기로는 J.에릭좁스의 《베르셀리우스, 그의 생애와 작품(1970)》 등이 있다.

크리스티안 쇤바인 (Christian Friedrich Sch겐nbein: 1799∼1868)

    국적 : 독일

    업적 : 니트로셀룰로오스 발명

독일 화학자. 슈바벤의 메칭겐 출생. 14세부터 화학공장에서 일하면서 화학을 공부하였다. 1821년부터 에를랑겐대학·튀빙겐대학에서 물리학·화학을 공부하였다. 28년에 스위스 바젤대학에 초빙되어 35년 교수가 되었다. 39년 물을 전기분해할 때 이상한 냄새가 나는 기체를 발견하였고, 그리스어의 ozein(냄새나다)에서 오존(ozone)이라고 명명하였으며, 오존화합물(ozonide)도 발견하였다. 45년에는 H.브라코노가 발견한 질산섬유소(nitrocellulose)가 목면을 혼합산(진한 황산과 진한 질산의 혼합물)으로 처리하면 쉽게 합성됨을 발견하였고, 또한 46년에 콜로디온·면화약을 발명하였다. 그는 원자론 입장에서 정량적 연구를 하였다.

 

웬델 스탠리 (Wendell Meredith Stanley: 1904∼1971)

    국적 : 미국

    업적 :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를 결정체로 추출하는데 성공

미국 생화학자. 리지빌 출생. 1929년 일리노이대학을 졸업하고, 이 대학 화학연구소에서 뮌헨대학으로 유학, 32년 귀국 후 록폘러연구소에 들어갔다. 48년 캘리포니아대학으로 옮겨 바이러스연구소를 창설하고 소장을 지냈다. 1935년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TMV)를 결정체로 추출하는 데 성공, 결정화된 화학물질이 생물처럼 증식하여 병을 일으킨다고 발표하여, 당시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또 일찍이 암(癌)의 바이러스학적 연구의 중요성을 계속 지적하였다. 46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르네 쥐스트 아위 (Rene-Just Hauy: 1743∼1822)

    국적 : 프랑스

    업적 : 결정 발견

프랑스 광물학자. 파리 출생. 1783년 결정(結晶)의 규칙성에 관한 학설을 발표하면서, 결정은 <몰레큘>이 모여서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생각한 몰레큘은 오늘날의 원자나 분자에 해당하지만 당시는 판명되지 않았다. 그 뒤 결정면의 성질을 간단한 정수비로 표시하는 것에 관해서도 언급하였는데, 이것은 나중에 <유리지수의 법칙>으로 불려졌다. 1801년과 22년 《광물학개론》을 저술하였으며 특히 제1관에는 그림을 많이 사용하여 몇 개의 기본형을 가진 구성미립자가 겹쳐져서 결정을 만드는 것을 설명했다. 유명한 방해석이나 황철석 결정의 설명도는 오늘날에도 많은 광물교과서에 인용되고 있다.

 

윌리엄 울래스턴 (William Hyde Wollaston: 1766∼1828)

    국적 : 영국

    업적 : 원소 팔라듐(1802)과 로듐(1804) 발견

영국 화학자·물리학자. 노퍽주 출생.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792년 개업했으나, 1800년에 화학으로 전향하여 백금의 가단상태(可鍛狀態)를 만드는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중 백금광석의 분석에 의해 새로운 원소 팔라듐(1802)과 로듐(1804)을 발견했다. 1805년에 가단성백금의 제조법을 고안하고 극세백금선(울러스턴선)을 만들어 판매하여 많은 이윤을 남겼으며, 20년에는 로열소사이어티회장이 되었다. 이론화학에서 J.돌턴의 원자설에 대한 울러스턴의 견해를 살펴보면 1808년 이미 염류의 구성성분이 돌턴의 배수비례의 법칙에 따른다는 것을 나타내어 원자설 수용에 공헌했지만, 수년 후 분자 중의 원자수결정법에는 근거가 없고 원자의 실재에도 의문이 있다는 입장에서 원자량 대신 <당량(當量)>의 채용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산소를 10으로 하여 각 원소의 당량을 계산하고, 로그눈금의 새김에 의한 계산자로 나타냈다. 원자설에 대한 이 실증주의적 회의와 당량개념은 뒷날 그가 원자설로 복귀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영향을 미쳐 19세기 중반까지 화학계에 혼란을 가져왔던 원인의 하나였다. 다른 분야는 결정학에서의 반사측각기의 개량, 염화나트륨형 결정구조의 제창, 광학에서의 수차(收差)를 없앨 수 있는 현미경복합렌즈(울러스턴렌즈), 메니스커스렌즈, 카메라루시다 등 기구의 개량, 태양스펙트럼 중 암선(프라운호퍼선)의 발견, 생리학에서의 신장결석의 기본성분 결정, 고음청각에서의 개인차 발견 등이 있다.

 

유카와 히데키 (湯川秀樹: 1907∼1981)

    국적 : 일본

    업적 : 원자를 구성하는 작은 입자들 중 일부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발견

일본 이론물리학자. 도쿄〔東京〕 출생. 1929년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이학부를 졸업, 40년 교토제국대학 교수가 되었다. 한때 도쿄제국대학, 미국의 프린스턴고급연구소, 컬럼비아대학 등의 교수를 겸했는데, 53년 이후 정년퇴임까지 교토대학 기초물리학연구소장을 지냈다. 32년 J.채드윅의 중성자 발견으로 원자핵이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진 것이 밝혀졌는데 그와 함께 양성자·중성자를 서로 결합시키고 있는 힘은 무엇인가가 큰 문제로 되었다. 한편 원자핵의 β붕괴의 연구로부터 당시 미지의 중성미자(뉴트리노)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유카와 히데키는, 하전입자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전자기장이 매개한다고 유추하여 양성자·중성자를 결합시키는 미지의 힘의 장(場)이 있다고 했다. 이것에 장의 양자론을 적용하면 장에 수반되는 어떤 종류의 입자가 있으며 힘의 유효거리의 크기로부터 그 질량은 양성자와 전자의 질량의 중간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이 입자를 중간자, 그 장을 중간자장이라 한다. 또 이 중간자가 전자와 중성미자로 붕괴한다고 함으로써 원자핵의 β붕괴까지도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현재 원자핵 속에서 양성자·중성자를 결합시키는 힘과 β붕괴의 메커니즘은 더욱 복잡하다는 것이 알려졌지만 유카와 히데키의 이론은 현재의 소립자론에서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사고방식을 최초로 도입한 것으로, 물리학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고 그것을 계기로 소립자론이라는 큰 영역이 발전했다. 유카와 히데키는 이 연구로 49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소립자론에서는 현재 가장 고도의 이론인 장의 양자론이 기초로 하고 있는 시간공간개념이 매우 소박하다는 점을 개량하여 소립자의 통일이론의 달성을 시도하고 이 입장에서 지금까지 생각하던 장이 시간공간의 1점만의 함수임을 개량한 비국소장의 이론, 시간에는 분할 불가능한 기본영역이 있다는 소영역(素領域)이론 등을 제창했다. 

월리스 캐러더스 (Wallace Hume Carothers: 1896∼1937)

    국적 : 미국

    업적 : 나일론 발명

미국 화학자. 아이오와주 벌링턴 출생. 나일론과 네오프렌의 발명자이며 유기화학과 고분자화학분야 연구로 잘 알려져 있다. 1920년 타키오대학을 졸업하고 24년 일리노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리노이대학과 하버드대학의 유기화학 강사를 거쳐 28년 뒤퐁사(社)의 유기화학 연구부장이 되었다. 그 뒤 9년간 독일의 H.슈타우딩거가 제창한 거대분자설의 입장에서 고분자합성 기초연구에 참여하여 합성고무 네오프렌과 합성섬유 나일론의 발명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고분자합성에서 사용한 방법은 에스테르화나 아미드화에 따른 축합중합(縮合重合)이었다. 이러한 계통적 연구에서 폴리에스테르의 합성에 성공하였고 네오프렌이 1929년 클로로프렌중합으로 만들어져 31년부터 공업화에 들어갔다. 나일론은 헥사메틸렌디아민과 아디프산의 축합중합으로 35년에 만들어졌으며 38년 뒤퐁사가 나일론이라 이름지어 39년부터 공업화가 시작되었다. 고분자에 관한 52가지 논문을 발표하고 62가지 미국특허를 얻었으며 고분자화학공업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936년 산업계에 종사하는 유기화학자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과학아카데미회원으로 선임되었다. 40년 그의 논문 가운데 중요한 것을 모아 놓은 《고중합물(高重合物)에 관한 캐러더스논문집》이 출간되어 합성고분자화학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학문적·사회적 성공과는 달리 오랜 우울증을 보이다가 음독자살하였다.

 

프리드리히 케쿨레 (Friedrich August Kekulevon Stradonitz: 1829∼1896)

    국적 : 독일

    업적 : 탄소화합물의 분자구조를 밝히고 유기화학구조론의 기초를 확립

독일 화학자. 다름슈타트 출생. 기센대학 건축과에 입학하였으나 J.리비히의 영향을 받아 화학분야로 전향하였다. 1852년 기센대학 졸업 후 파리에서 공부하던 중 C.F.제라르가 도입하고 A.W.윌리엄슨이 확장시킨 유기체유형이론에 큰 영향을 받았다. 56년 귀국한 뒤 하이델베르크 강사, 58년 벨기에 겐트대학 교수, 67년 독일 본대학 교수를 역임하면서 J.F.W.A.바이어·J.H.반트 호프·E.피셔·A.라덴브르크 등의 우수한 화학자를 길러내기도 하였다. 가장 큰 업적은 탄소화합물의 분자구조를 밝혀내어 고전적 유기화학구조론의 기초를 확립한 것으로, 그가 처음에 배운 건축학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1858년 탄소원자는 4가의 원소이며 상호결합하여서 원자연쇄를 구성한다는 탄소원자의 연쇄설(連鎖說)을 발표하였는데 이 사슬을 골격으로 각종 지방족화합물의 분자구조를 밝혀내었다. 한편 A.S.쿠퍼도 케쿨레와 거의 동시에 같은 학설을 발표하였다. 65년 벤젠의 고리구조론에서는 벤젠분자를 6개의 탄소원자가 고리모양으로 결합한 것으로 전제하고 방향족화합물의 구조를 해설하였다.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화학구조에 의하여 유기화합물의 성질·화학작용·제법 등을 고찰해 나가는 실험과 공업에 응용하는 길이 열렸다. 저서로 《유기화학 교과서(1861∼87)》가 있다.

 

마리 퀴리 (Marie Curie: 1867∼1934)

    국적 : 프랑스

    업적 : 라듐 원소 발견 등

프랑스 화학자. 폴란드 바르샤바 출생. 본명은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이다. 중학교 수학·물리학교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과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경제적 어려움을 무릅쓰고 1891년 파리대학 이학부(理學部)에 입학하여 93년 물리학과를 수석으로, 94년에는 수학과를 차석으로 졸업하였다. 같은해 봄 파리물리화학학교 실험주임으로 있던 P.퀴리와 만나 95년 결혼하였다. 95년 W.K.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고, 96년에 A.H.베크렐이 X선과 비슷한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사진 건판(乾板)을 감광시키는 방사선(베크렐선)이 우라늄화합물에서 나온다는 것을 발견하는 등 뒷날 퀴리부부의 연구에 이어지는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졌다. 97년말 마리는 박사논문 주제로 <베크렐선의 해명>을 선택하였다. 이 연구에 남편 피에르가 발명한 퀴리 전위계를 이용, 공기를 이온화해서 전기전도성(電氣傳導性)을 부여하는 베크렐선의 성질을 통하여 그 세기를 정량적(定量的)으로 측정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베크렐선의 세기는 우라늄원소 함량에 비례한다는 점과 우라늄의 물리적·화학적 상태에는 관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마리는 베크렐선이 우라늄원자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밝혔다. 또한 다른 원소에 관해 조사한 결과 토륨도 베크렐선과 같은, 더구나 우라늄보다 강한 방사선을 내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이러한 방사선을 내는 성질을 방사능(放射能;radioactivity)이라고 이름붙였다. 우라늄 광물의 피치블렌드(역청우라늄광)을 조사한 결과 그 방사능이 금속우라늄보다 4배나 강한 사실을 발견하였으며 우라늄·토륨 이외에도 방사능을 가진 미지의 원소가 있음을 추론하고 그 단리(單離)를 시도하였다. 이 시기부터 피에르도 연구에 직접 협력하였으며, 98년 7월 6일 비스무트와 함께 침전하는 물질 속에서 우라늄의 330배나 되는 방사능을 가진 물질을 얻었다. 마리는 이것을 새로운 원소로 보고 조국의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런데 우라늄·토륨·폴로늄을 제거한 잔액에 다시 강한 방사능이 있음을 알아내고, 바륨과 함께 침전한 물질 속에 존재가 예상되는 이 새로운 원소에 방사선을 뜻하는 라틴어 라디우스(radius)를 본따 라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퀴리부부는 스펙트럼분석의 권위자인 친구 E.드마르세가 발광(發光) 스펙트럼사진을 촬영해 준 것을 가지고 새 원소임을 확인하였으며 98년 12월 26일 이 2가지 원소를 프랑스 과학학사원에 보고하였다. 마리는 다시 요아힘스탈광산에서 우라늄광석 찌꺼기를 얻어와 거기에서 라듐을 추출하는 실험작업에 들어갔다. 잘게 빻은 앙금에 진한 황산을 넣고 자기(磁器)냄비 속에서 끓여 바륨과 라듐의 황산염혼합물을 얻었으며, 이것을 다시 처리해 염화물(鹽化物)로 바꾸어 두 염화물의 용해도차(溶解度差)를 이용해 분별결정화하는 순서를 되풀이한 결과, 1902년 우라늄의 몇백 배나 되는 방사능을 가진 순수한 라듐염(염화라듐) 0.1g을 얻었다. 이때까지 처리한 광석찌꺼기는 8톤이나 되었다. 다시 드마르세에게 스펙트럼분석을 의뢰하여 거의 순수한 라듐의 염화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그 원자량을 측정해 225.93을 얻었다(실제로는 226.0254, 질량수 226). 이 연구로 1903년 마리는 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같은해 제 3 회노벨물리학상이 베크렐 및 퀴리부부에게 수여되었다. 이듬해 피에르는 파리대학 교수가 되고 마리는 그 대학의 실험주임이 되었다. 1906년 여성으로서 최초로 파리대학강사가 되었으며 이어서 1908년에는 교수가 되었다. 마리는 앞서 얻은 염화라듐 0.1g을 원료로 해서 라듐을 화합물로서가 아닌 홑원소물질 즉 금속으로서 얻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영국 물리학자 W.T.켈빈으로부터 라듐은 원소가 아니라 납과 헬륨의 화합물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었으나 마리는 염화라듐을 물에 녹여 전해하여 수은인 아말감을 만들고 그 다음에 수은을 제거하여 1910년 드디어 미량의 금속라듐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이듬해 마리는 이 실적으로 제11회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이리하여 마리는 여성으로서 최초로, 그리고 사상 최초로 2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다. 13년 바르샤바에 방사능연구소를 설립하고 14년 파리 라듐연구소 설립에 협력하였으며, 제 1 차세계대전이 시작되자 X선검사반을 조직하고 또한 자동차에 발전기와 X선장치를 실은 이동X선반을 만들어 의료활동을 하였다. 19년 라듐연구소에서 연구를 재개하였으며, 21년 미국인 멜로니부인의 노력으로 두 딸과 함께 미국을 방문해 라듐 1g을 기증받았다. 주요 저서로 파리대학에서의 강의를 토대로 엮은 《방사능》 상·하권이 있다

 

피에르 퀴리 (Pierre Curie: 1859∼1906)

    국적 : 프랑스

    업적 : 피에조 전기 발견 등

프랑스 물리학자. 파리 출생. 16살 때 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해 파리대학 이학부(理學部)에들어갔다.학생시절과소르본대학실험조수 시절에 당시 소르본대학 광물학연구실에서 실험조수로 일하고 있던 형 자크와 함께 공동실험을 하였다. 1880년 두 사람은 수정이나 전기석(電氣石)의 어느 방향으로 자른 박판(薄板)을 압축하면 압력에 비례하는 양과 똑같은 반대전기가 대전(帶電)하는 현상, 즉 피에조(piezo)전기를 발견하였다. 그 뒤 G.리프만이 전기장의 작용 밑에서 결정(結晶)에 장력(張力)이 작용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예측하였으며, 두 사람은 81년 그것을 실험으로 확인하였다. 또 두 사람은 피에조전기를 이용한 정밀측정장치를 발명하였다. 82년 그는 파리시립물리화학학교 실험주임이 되었고 결정의 대칭성에 관한 연구에 들어갔으며 90년 무렵부터 여러 가지 물질의 자기적(磁氣的) 성질에 관한 실험에 몰두하였다. 그는 매우 정밀한 비틀림저울을 사용하여 수많은 물질에 대해 광범한 온도범위에 걸쳐 자화율(磁化率) 변화를 확인하였다. 그 결과 비스무트 이외의 반자성체(反磁性體;물, 암염, 몇가지 칼륨염, 수정, 몇가지 비금속원소)의 자화율은 온도변화와 관계없이 일정하였다. 이와 반대로 상자성체(常磁性體;산소·팔라듐·플라티나·망간 등)의 자화율은 절대온도에 반비례하였다. 또한 강자성체(强磁性體;철·니켈 등)의 자성은 물질 특유의 온도(퀴리점)에서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러한 결과를 95년 《여러 가지 온도에서 물질의 자기적 성질》이라는 논문으로 출판하였고 이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다. 1894년 폴란드에서 소르본으로 유학온 마리 스클로도프스카와 결혼하였다. 96년 A.H.베크렐이 방사능을 발견하였고 98년에는 마리가 하고 있던 방사능 연구에 합류해 부부의 공동연구가 시작되었다. 이미 우라늄 광석 피치블렌드 속에서 우라늄과 토륨이 발견되고 있었으나 두 사람은 그것 이외에 강한 방사능을 가진 물질이 포함되어 있음을 예상하고 화학분석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98년 방사성이 매우 강한 폴로늄·라듐을 발견하였으며 고투 끝에 분리정제에도 성공하였다. 1903년 이 연구로 퀴리부부와 베크렐은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으며 피에르는 라듐이 전쟁이나 범죄를 위하여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수상기념강연을 하였다. 1906년 4월 19일 교통사고로 죽었다. 

윌리엄 퍼킨 (Sir William Henry Perkin: 1838∼1907)

    국적 : 영국

    업적 : 적자색 화합물 발견, 방향족불포화산을 합성하는 방법(퍼킨반응) 발견

영국 화학자·기술자. 런던 출생. 왕립화학학교에서 A.W.호프만에게 배우고 뒤에 그의 조수로 일하였다. 자택에 작은 실험실을 두고 여러 가지 화학실험을 하였다. 1856년 아닐린에 키니네 합성을 실험하던 중, 우연히 아름다운 적자색(赤紫色) 화합물을 발견하였다. 새로운 발견은 아니었지만 매우 아름다운 물질이었으므로 염료로 이용하기 위하여 특허를 얻었는데, 그것이 모브이다. 그는 모브의 공업적 제조를 계획하여 학교를 퇴직하고 그린포드에 공장을 세웠다. 제조공정은 조제(粗製)벤젠의 정제·니트로화·환원·산화·정제 등 복잡한 공정으로 이루어져 초기 공업화가 될 때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 작업에서 그는 기술자로서의 역량을 크게 발휘하였다. 이것이 영국에서의 합성염료공업의 시초이다. 이어서 69년 안트라센에서 염료 알리자린을 합성하여 특허를 신청하였다. 그러나 독일 C.그레베보다 하루가 늦어 유럽대륙에서의 특허권 장악에 실패하였다. 이 사실은 독일의 합성염료공업 기술이 거의 영국에 육박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 뒤 1874년 염료제조를 중지하고 화학자로 되돌아와 75년 방향족(芳香族) 알데히드와 지방산나트륨에 무수초산(無水酢酸)을 작용시켜 방향족불포화산을 합성하는 방법(퍼킨반응)을 발견하였다. 또 이 방법에 의해 벚나무잎의 방향성분인 쿠마린을 합성하였다. 이것은 천연향료합성의 선례이다. 또한 화합물의 구조와 자기장의 광회전성과의 관계 등 유기화학의 중요한 분야를 개척하여 화학자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06년에는 모브 발견 50주년축제가 열려 독일·프랑스의 화학회에서 상패, 영국으로부터는 경(Sir)의 칭호를 받았다. 두 아들 윌리엄과 아서도 유기화학자이다.

 

조지프 프리스틀리 (Joseph Priestley: 1733∼1804)

    국적 : 영국

    업적 : 탄산가스를 이용하여 소다수를 발명

영국 신학자·화학자·연상(聯想)심리학자. 필드헤드 출생. 19세 때 다벤트리의 비국교파 신학교에 입학, 다방면에 걸친 연구와 저작활동을 하였다. 언어학자로서는 고대 여러 언어에 통달하고, 신학자로서 《그리스도교 부패사(1782)》《서로마제국 멸망까지의 그리스도교회 일반사(1790∼1803)》 등을 저술하였다. 철학서적 《물질과 정신에 관한 연구》, 정치서적 《정치적·시민적·종교적 자유의 본질에 관한 에세이(1768)》, 과학서적 《전기학의 역사와 현상》을 비롯하여 가스(gas)수집방법과 화학적 분석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내고 탄산가스를 이용하여 소다수를 발명하였다. 자신의 철학은 유물론 또는 필연론(必然論)이며, 인과적 필연성이 물질과 정신을 지배하는 불변의 법칙이어서 여러 정신적 능력도 <뇌와 같은 유기적 구조를 가지는 것>의 성질이고 뇌를 구성하는 물질적 입자가 흩어지면 그 성질로서의 여러 능력도 소멸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입자는 불변하므로 다시 일정한 형태로 결합하면 모든 정신작용이 재생되고 신은 이러한 필연성을 자기계획 또는 배려로써 세계를 형성한다고 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정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은 명예혁명에 관한 J.로크의 정치이론에 따랐다. 그는 정치적 자유와 신민적 자유가 극대(極大)인 국가를 이상적으로 여겼고, 프랑스혁명에 공감하여 미국 독립전쟁에 참여하였다

프리츠 하버 (Fritz Haber: 1868∼1934)

    국적 : 독일

    업적 : 암모니아를 합성법 성공

독일 화학자. 브로츨라프 출생. 베를린대학·하이델베르크대학 등에서 공부한 뒤 1894년 카를스루에공업대학 연구생, 1906년 동대학 교수가 되었다. 11년 베를린의 카이저빌헬름물리화학연구소 초대 소장 및 베를린대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전기화학·기체반응분석에 뛰어난 업적을 쌓았으며, 1904년부터 질소·수소에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908년 C.보슈와 협력하여 공중질소 고정에 의한 암모니아합성법에 성공, <하버―보슈법>의 창시자가 되었다. 이어 바스프사(社)와 공동으로 암모니아 합성의 공업화에 관한 연구를 수행, 13년 공업화에 성공함으로써 암모니아 합성공업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8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그 밖에도 1909년 용액의 산성도를 측정하는 유리전극을 발명하였다. 저서에 《공업전기화학요강(1898)》 《공업적 가스반응의 열역학(1905)》 등이 있다.

 

험프리 데이비 (Humphry Davy: 1778∼1829)

    국적 : 영국

    업적 : 새로운 화학물질을 많이 발견

영국 화학자. 콘월의 펜잰스 출생. 1795년부터 약제사 겸 외과의사 밑에서 연한부로 일한 뒤에, 98년부터 T.베도스가 브리스틀에 세운 <기체연구소>에 채용되어 기체의 화학적·생리학적인 연구에 몰두, 일산화이질소(아산화질소;laughinggas라고도 한다)의 마취성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 연구로 화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었으며, 당시 런던에 자연과학의 보호·육성을 목적으로 신설된 왕립연구소의 조교수로 임명되었고, 1802년부터 12년까지 화학교수로 재직했다. 1806년부터의 볼타전지를 이용한 전기화학의 실험으로 알칼리금속과 알칼리토금속의 단리에 성공하였다. 이것으로 그는 나폴레옹상의 최초 수상자가 되었으며, 더욱이 이 실험 등을 통하여 화학결합의 근원이 전기적 극성에 기인하는 것임을 밝혔고, 물질의 구성에 관계하는 <베르셀리우스의 2원소설>로의 길을 여는 등 전기화학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또 1808년에는 셸레가 처음으로 얻은 염소의 원소성을 확인하고, 이 과정에서 염소화합물의 연구 등을 통해 A.L.라부아지에의 산소 중심의 산이론을 수정하여, 수소 중심의 산이론을 제창하였다. 이러한 산의 산소설 부인, 라부아지에의 칼로리이론(caloric theory;熱素說)을 부정하고 열입자의 운동으로 귀착시킨 것, 모든 발열반응이 산화라고 하는 견해의 타파 등으로, 그는 라부아지에에 의한 화학혁명을 보다 완전한 것으로 이룩하였다. 또 돌턴의 원자설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회의적이었다. 12년에 작위를 받아 <경>의 칭호를 얻었다. 1802∼12년까지 농업개량회에 초빙되어 농예화학 강의를 했으며 농업에 화학을 적용하였다. 이 강의 내용을 하나로 묶어 13년 《농예화학원론》을 출판하였다. 이것은 J.리비히 이전의, 이 분야에 있어서 대표적 저작의 하나가 되었다. 12년에 결혼하고 왕립연구소 교수직을 사임하였으나 왕립연구소 실험실에서의 연구는 계속하였다. M.패러데이가 그의 실험실 조수가 된 것은 13년이다. 20년에 왕립협회 회장에 취임하였으나 건강이 쇠약해져 요양을 받던 중 29년에 50세로 죽었다. 그의 과학적 업적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1807∼1808년에 걸쳐 이룩한 전기화학에 대한 업적이다. 당시 양쪽 극 사이에 물만 존재하는 경우 양쪽 극에 각각 산과 알칼리가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었으나, 이 현상이 불순물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데이비는 수소로 공기를 완전히 제거한 진공 속에서 금제용기를 사용하여 실험함으로써 증명하였다. 또 뒤에 이온개념에 의해 설명되는 용액 내의 물질 이동과정을 많은 실험을 통하여 처음 조직적으로 밝혀냈다. 또한 금속산화물과 유사한 성질을 가진 점에서 주목되고는 있었으나 그때까지 금속이 단리되지 않았던 알칼리(알칼리금속·알칼리토금속)를 강력한 서모파일에 의한 작용을 이용해서 분리에 성공하였다. 그가 전기분해에 의하여 처음으로 단리한 원소는 칼륨·나트륨·칼슘·베릴륨·스트론튬·마그네슘이다. 또한 그가 고안한 안전등은 오늘날에도 이용되고 있다.

 

찰스 홀 (Charles Martin Hall: 1863~1914)

    국적 : 미국

    업적: 직접전해법 발명

미국 화학기술자. 오하이오주 톰프슨 출생. 1886년 오벌린대학시절 때 스승인 F.F. 주에트가 연구하던 알루미늄제법(製法)을 개량, 용해한 빙정석(氷晶石)에 산화알루미늄을 용해하여 전해액(電解液)으로 사용하는 직접전해법(直接電解法)을 발명하였다. 그와 생몰년이 같은 프랑스의 P.L.T. 에루와 우연히 같은 해에 같은 방법을 발명하여 홀―에루법이라 한다. 89년 피츠버그리덕션회사(지금의 알코아사)가 이 방법을 공업화하여 알루미늄공업을 발전시켰다. 90년 이후 이 회사의 부사장을 지냈다